재수없는 흰가면이 이도현의 속을 뒤집어놓은지 꼬박 이틀이 지났다. 농담따먹기나 어줍잖은 비유 같은게 아니다. 헤르메스는 말 그대로 이도현의 배를 '갈랐다'. 갈비뼈가 훤히 보일정도로 길게 가르고 벌려서 그 내부를 좋을대로 헤집었다. 헤르메스는 그의 가면만큼이나 새하얀 정장을 입는데 그것이 이도현의 피로 -그걸 피라고 부르는게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새카맣게...
침대 옆, 작은 탁상에 옛 물건을 모아둔 서랍이 있다. 옛 물건이라 함은, 이 곳에서 머무르게 되기 전에는 지니고 다녔지만, 지금은 손댈 일조차 없는 물건을 의미한다. 의도적으로 한 곳에 모아둔 것은 아니다. 편하게 손 닿는 곳이다 보니 별 생각 없이 한두개씩 던져둔 것이 어느덧 꽤나 모였을 뿐이다. 몇 가지만 나열해보자면 마모되어 쓸 수 없는 오래된 동전...
당신이 휩쓸고 간 곳에 남긴 최후의 발자국 위에 어렴풋이 작은 불꽃이 일다가 이윽고 큰 불길로 번져 거대한 화염덩어리가 되었다. 그렇게 하나, 둘. 그리고 이제는 도시 하나가 불타고 있다. 나는 한 때 건물이었던 잿더미가 텁텁한 공기 속에 흩날리는 것을 보았다. 그 사이에서 간혹 아직 붙어있는 불씨가 공중에서 붉게 반짝였다. 마치 구조 신호를 보내는 듯 깜...
아침부터 틀어놓은 티브이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끊임없이 주절거리고 라디오는 3주째 1위를 달리고 있다는 유행가를 줄창 불러대고 있었다. 무료한 한낮. 노래가 끝난 뒤, DJ가 날이 아직 덥다며 친절하게도 최고기온을 알려주었다. 오늘은 29도까지 올라간다지요? 도정화는 쨍쨍한 바깥을 향해 고개를 돌리다 눈살을 찌푸렸다. 따가운 햇볕에 눈이 부시다 못해 머리가...
A는 하루종일 나사가 빠져서 고장난 로봇처럼 굴었다. 다름아닌 '식빵 한 장' 때문이었다. 식 빵 190204, @SESAM_3 A의 머리속에서 맴도는 식빵의 이미지에는 달리 특별한 점이 없었다. 어느 베이커리에 가도 찾아볼 수 있는 아주 흔한 우유 식빵과 차이점이 하나도 없는, '초코'라든지 '녹차' 같은 수식어조차 붙지 않은 평범한 식빵이었다. 그럼에도...
미샤오는 우울할 때면 사탕을 먹는다. 자그마한 과일맛 사탕들이다. 이로 깨부수지도 않고 녹아 없어지는 것마저 아쉬워하며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계속해서 새 사탕을 까넣는다. 어떤 맛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달고 동그란 것이 입 안을 굴러다니는 하찮고 웃기는 행복을 느낄 뿐이다. 입천장이 다 까지도록 먹어대고 너무 달아 속이 니글거려도 마냥 좋다. 따끔거리는 ...
※ 유혈 표현 ... 진짜 깨알만큼 있지만 어쨌든 있는건 있는거니까 일단 주의 달아둠. 미친 것처럼 손에 쥐여진 모든걸 휘두르고 다녔다. 그야말로 미친 것처럼. '이런 일'에 거부감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천이재라는 인물은 천성부터 모질지 못했다. 발로 차 본 것은 공 뿐이고 배트로 때려본 것도 공 뿐이다. 칼은 요리할 때나 쓰는 것이었고 끈은 물건을...
가뭄의 단비 같은, 긴 야근 끝에 간만의 회식이었다. 제법 큰 프로젝트가 시작된 후 모두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그야말로 회사에서 살다시피 했던 직원들이 다들 피곤에 쩔어 있었던 탓일까. 고작 몇 시간이지만 이게 어딘가 싶은 마음에 너 나 할 것 없이 '부어라, 마셔라!'를 외치며 회식 자리를 시끌시끌하게 만들었다. 그 안에서 용준과 사선도 예외는 아니...
- 사차야. 용준은 사무실 의자에 앉은 사선의 허벅지에 위에 올라타 천천히 넥타이를 풀었다. 사선은 그 광경을 응시하며 아마도 침을 한번 삼켰을 것이다. 길게 잡은 넥타이로 사선의 뒷목을 둘러 제 쪽으로 끌어당긴 용준은 입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입꼬리를 올려 웃다가 그대로 넥타이를 놓았다. 대신 용준은 사선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조금 더 몸을 밀착시...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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